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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보통 - 여행의 기술

Whale_Rice 2021. 9. 18. 23:27

그럼에도, 나아간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여행을 떠난다. 어떤 이는 휴식을 위해 산이나 바다로 떠나고, 누군가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다른 지역을 탐험한다. 또 다른 이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해 시장이나 관광지로 향한다. 허나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도피이다. 작년 여름 꽤 여러 가지 아픔을 맞이하였다. 고통이란 놈들은 다소 비겁하여, 단독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묻어놓았던 괴로움과 모두 잊었다고 생각한 불안감과 함께 온다. 마치 무리 지어 다니는 불량 학생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일에 현기증이 났다. 어떤 것을 위해 달려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버거웠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과 그런데도 나를 돌볼 사람은 나뿐이라는 위로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속에서 길을 잃었다. 도망쳐야 했다. 그 어디든 말이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이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본 책 78p) 나의 주된 여행 계획은 간단하다. 그냥 자연을 홀로 걷기. 10km-20km 정도 되는 거리를 무작정 걷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으면서 말이다.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 든다.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뚜렷해진다. 외부로 향해 있던 시선이 이제야 나에게 향한다. 그간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애써 무시해왔던 값진 것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어젯밤에 먹고 남긴 카스테라, 인형 믕믕이와 안락한 침대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

 

그들은 먹고 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본 책 180p) 내가 속한 서울에서 나와 들판을 고즈넉하게 걸을 때, 자연과 대비된 도시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잘해야 하고, 어떤 것이든지 나를 돋보이게 해야 하며, 어떠한 고난 속에도 웃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이상적 인간상이 가득한 사회. 사실 그 이면에는 조금의 실수라도 저지를까 전전긍긍하며, 남의 시선에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공허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물론 나도 이 집단에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본 책 228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가기로 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연약한 나를 인정하기로 한 것. 너무나도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나에게 주어진 숙명이나 이 순간들을 전력을 다해 싸울 수 없어도, (더 나아가 지더라도) 나 자신만큼은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 어쩌면 지는 게 당연한 이 세상 속에서 링 위에 올라가 대결을 펼치는 나 자신을 스스로 대견스럽게 여기는 것.

 

사비에르 드메스트르는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인 파자마를 입고 자신의 방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우리에게 먼 땅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본 것에 다시 주목해보라고 슬며시 우리의 옆구리를 찌른다.” (본 책 318p) 그러하기 위해서는 현재에 감사하고 나 스스로를 많이 돌봐줘야 했다. 이 여행에서의 충만함을 도시에서 그대로 느낄 수는 없을 테지만, 도시에 숨어 있는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마치 나의 일생을 여행인 것처럼. 그렇게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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